『우리글 바로 쓰기』 VS 『감염된 언어』 - 언어 민주화와 언어의 순결 / 권정관(문화평론가)
1.
말이란 것은 하나같이 다 사람의 입을 통해 뱉어져 나온다. 그렇지만 그게 그리 단순한 ‘물건’은 아니다. 우선 뱉고 빨고 먹고 숨쉬는 입, 말하는 입, 이 입은 인간 이해의 가장 결정적인 입구라고 나는 생각한다. 입은 구강 구조의 정교한 저작과 작동으로 수없는 말들을 만들어낸다. 세상엔 5천 가지가 넘는 인간의 언어가 있다는 보고가 있고, 거기엔 서로 다른 꺾임과 떨림과 공명이 있으며 소리들의 무수한 분절과 조합이 만들어내는 경우의 수만큼이나 셀 수 없이 많은 소리 세포들이 있다. 뿐인가. 거기엔 문화, 예술, 자연, 사회, 정치, 경제, 과학 등 인간의 삶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이 지문처럼 묻어 있고 코일처럼 얽혀 있다. 해서, 말은 최근까지도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
그 가운데 제일 굵직한 논쟁의 가닥은 아무래도 주로 언어 제국주의와 언어 내셔널리즘 문제로 표출되어온 ‘언어와 권력’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역사적으로 언어의 장(場) 내부를 수놓아온 보이지 않는 무수한 싸움들이 이를 잘 뒷받침한다. 이런 사례들은 그 싸움의 양상이 매우 다양한 층위에서 천연덕스럽고 교묘하게 벌어지는 걸 특징으로 하는데, 내가 중학교 때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의 경우가 그렇다. 나는 이 작품을 매우 비장하면서도 애틋한 심정으로 읽었던 듯하다. 예컨대 이런 장면은 지금 읽어도 ‘마음의 줄’을 건드린다.
“여러분, 이것이 내 마지막 수업이에요. 베를린에서 알사스와 로렌의 학교에서는 독일어만 가르치라는 지시가 내렸어요. 내일 새 선생님이 오십니다. 오늘로써 프랑스어 공부는 끝입니다. 명심해 들어요.”
선생님의 말씀에 뒤이어 주인공은 “아, 고약한 놈들 같으니! 면사무소에 나붙은 게시는 바로 그거였어요.”라고 분노한다. 그런데 1999년 10월 일본, 프랑스회관과 히토쓰바시대학 주최로 열린 국제 심포지엄 ‘언어와 제국주의의 과거와 현재’에 발표한 논문집 『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돌베개)란 책에 보니, 이는 도데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논문을 쓴 미우라 노부타가에 따르면, “당시의 알사스 사람들은 독일어의 한 방언인 알사스어를 모어(母語)로 하고 있었고, 프랑스어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 습득해야 하는 제2언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프랑스어 수업이 마치 마지막 모어 수업인 것처럼 꾸며 놓고 있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도데의 속임수에 주인공보다 더 분노했다. 기왕에 나는 도데의 다른 작품들, 이를테면 「별」을 비롯하여 「보오켈 읍의 승합마차」「두 여인숙」「마지막 책」 따위의 단편들을 감명 깊게 읽었고 그 감동이 가슴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믿던 터라 배신감은 더했다. 그 빼어난 감성 아래 그토록 음험한 제국주의의 야욕이 숨어 있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이오덕 씨의 『우리글 바로 쓰기1, 2, 3』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낱말이나 말법의 많은 부분에 언어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충고한다. 그래서 이런 말을 계속 쓰는 것은 그들의 야욕에 놀아나는 ‘종살이 말’을 쓰는 거나 진배없는 일임을 경고한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우리 사회의 상층에 군림해온 사람들의 책임이 제일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우리말에 깃들인 ‘종살이 말’들을 샅샅이 들춰낸다. 이오덕 씨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농토를 많이 가지고 사람을 부려서 사는 이들과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 서로 갈라지게 되고, 농사일을 하지 않는 양반 계층들이 남의 나라 글자인 한문을 받아들여 그것을 쓰게 되고부터는 우리 말이 한문의 영향을 크게 입어 변질하게 되었고, 우리의 글자인 한글을 창제했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양반들이 쓰는 중국 글자말과 중국 글자 말투의 말이 생겨난 것이다. (중략) 우리 말은 중국 글자에만 수난당한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일본 말이 들어오기 시작하고는 일본말에 크게 상처를 받게 되었고, 우리 말은 우리 말법까지도 일본말을 따르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그리고 이 일본말은 또 중국 글자말을 마구잡이로 가져와 우리 말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여기서 더구나 주목할 것은, 일본이 이 땅을 침략해 온 뒤 일본말과 중국 글자말로 우리말을 짓밟아 온 일에는 외세에 붙어 행정에 참여하고 경제를 움직여온 지식인 계급도 한자리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식 계급은 일본 말글을 전파하고 일본 말법으로 우리 말글을 전파하고 일본 말법으로 우리 말글을 병들게 하는 데 앞장섰다. (중략) 우리 말은 ‘해방’의 날 8.15부터 중국 글자말과 일본말에 (이어서가 아니라) 겹쳐서 또 하나 서양말이 수난을 받았다. 서양말에서 받는 우리 말의 수난은 갈수록 심해서 이제는 정말 눈뜨고 도시의 거리를 걷기가 부끄럽고, 귀 열고 차 타기가 거북하다. 신문을 봐도 책을 펴도 그렇다. (중략) [우리 말이]‘삼중고’의 병신으로 앓고 있다. 우리 말글이 앓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 백성들이 앓고 있는 모습이다. (중략) 우리 말을 살린다는 것은 바로 우리 말을 백성의 말로 한다는 것이고, 우리 말을 백성의 말로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백성의 사회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말글이 이렇게 병든 것은 “백성들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힘을 가진 자’들과 그 힘을 부리고 행세하는 벼슬아치들이 그런 짓거리로나마 자신들의 잃어버린 권위를 유지해 보겠다는 안간힘”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거꾸로 가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말하자면 힘있는 나라의 말글이 우리나라의 힘있는 자들의 왜곡된 의식을 타내려와 민중들의 말글을 억압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은 ‘언어 민주화 운동’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통시적으로 이인직과 이광수의 이른바 언문일치의 문체에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거쳐 오늘날의 시인 김지하의 글까지, 공시적으로 초등학교 저학년의 글쓰기와 교과서, 그리고 신문 방송의 말글들을 비롯하여 문학 작품과 거리의 광고판이나 펼침막의 말글까지 아우르며 속속들이 ‘시비’를 건다. 심지어 사전까지 비판한다. 그의 비판을 피할 수 있는 건 몇몇 초등학생들의 글과 함석헌 씨의 글 정도다. 그만큼 ‘환부’가 넓고 ‘병세’ 또한 위중하다는 말인데, 그가 특히 심각한 병세로 지목하고 있는 환부는 한자말과 일본말 번역투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우리는 그 발언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대번 알 수 있다.
쓰레기가 쏟아져 나와 온 땅을 더럽히고 있다. 우선 급한 것이 이 쓰레기를 나눠 걷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른이고 아이고 쓰레기 나눠놓기를 마치 밥 먹고 물마시는 것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할 수 있도록 돼야겠는데 그게 안 된다. (중략) 행정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쓰레기 공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책을 세우고 시설을 갖추어 주어야 한다. (중략) 쓰레기를 한없이 쏟아내어 놓는 삶에 따른 말도 그렇다. 공해를 일으키는 행동은 말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매립(埋立)’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일본 사람들이 쓰는 중국글자말이다. 땅을 메운다는 뜻인데, 우리 말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수거(收去)’는 쓰레기를 거둬가는 사람(이런 사람을 ‘환경미화원’이라던가) 쪽에서 쓰는 말이니 ‘거둬가기’‘거두기’가 될 것이고, ‘분리수거’라면 ‘나눠걷기’다. (중략) ‘태운다’고 하면 될 것을 왜 ‘소각’한다고 쓸까? ‘활용’‘재활용’도 ‘살려 쓰기’‘다시 살려 쓰기’면 된다.
이쯤 되면 중국 글자말은 한마디로 “쓰레기”다. “땅에 묻지 말고, 태우거나 살려 써야” 하면 될 것을 굳이 “매립 탈피, 소각 자원화 등 모색 필요.”(새건강, 91.5.18)라고 쓰레기 같은 중국 글자말을 쓴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거다. 이에 비해 우리 말은 우리 몸과 삶에 착 달라붙는 알짜배기 말이다. 중국 글자말은 딱딱하고 모가 나서 우리 말을 찌르고 생채기를 낸다. 일본말 번역투도 사정은 같다. 특히 이오덕 씨는 ‘의’를 비롯한 토씨의 잘못된 쓰임에 대해 아주 강한 목소리로 비판한다. 오, 남용의 거의 전부가 일본말을 직역한 데서 온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동요 <고향의 봄> 가운데, ‘나의 살던 고향은......’ 하는 노랫말부터 토씨 ‘의’ 하나 때문에 어색하다. 그는 이를 ‘내가 살던 고향은......’으로 고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것은, 가령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다.
“민족의 분단과 통일에의 가능성”(한국, 91.9.27), “37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동아, 91.4.15), “유명문인에로만의 평론 집중현상”(중앙, 91.10.7), “은행원으로서의 그의 서울 생활”(한겨레, 91.5.3)......
이오덕 씨는 여기서 주로 한국 언론의 말글에 일본말 직역투라는 비판을 퍼붓고 있지만 일급 문인이라고 해서 그의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반에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발표한 ‘젊은 벗들에게 주는 글’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이오덕 씨는 “논리도 이치도 없이 마구 터져나오는 감정을 내뱉는 말의 총알이란 느낌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특히 김 시인의 이런 말투가 특히 그의 마음에 영 안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연합적군 모리(森) 그룹의 산장에서의 피의 인민재판을 예고하고 있다.
이오덕 씨는 이 글을 두고, “‘의’가 세 번이나 연달아 나오는 말이 어떻게 우리 말일 수 있는가?” 하고 되묻는다. 또 ‘에서의’까지 마구 쓰고 있다고 못마땅해 한다. 그러고는 ‘연합적군 모리 그룹’이란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일본의 어떤 폭력 단체인 모양”이라고 숫제 내놓고 빈정거린다. 그런 뒤 이런 글쓰기야말로 바로 “글쓰기로만 살아온 한 지식인의 비극”이라고 못박는다.
이오덕 씨의 책에는 ‘쓰레기’나 ‘찌꺼기’, 또는 ‘병신 말’이나 ‘종살이 말’ 같은 아주 극단적이거나 섬뜩한 표현들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그에게서 어떤 근본주의나 원리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전체주의의 냄새까지 난다고들 한다. 물론 그런 혐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40년이 넘는 세월을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동들의 글쓰기를 지도하는 한편, 올바른 우리 말 쓰기 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이력에 ‘함부로’ 시비 걸 수 없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세상은 그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요지부동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런 ‘가당찮은’ 현실의 장이 그의 외침을 좀 이상한 모양새로 일그러뜨린 면이 없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에 이오덕 씨는 겉보기와도 다르고 다른 국어 순화론자들과도 좀 다른 면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오덕 씨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우리는 그 안에 찹찹하게 갈무리된, 그가 지닌 생각의 속살들을 만질 수 있다. 앞서 그가 했다는 “지식인의 위기”란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가 걱정하는 것은 삶과 말, 삶과 지식이 멀어지는 사태다. 그의 책에서 중국 글자말이나 일본말 직역투 등이 그 자체로 이미 문제로 지적되고 있지만, 그보다 이런 말글들이 글과 책을 통해서, 이른바 지식인을 통로로 해서 우리 말에 들어온다는 점을 더 크게 근심하고 있다. 그 결과 아이건 어른이건 삶이 숨쉬는 살아 있는 글을 못 쓰고 삶과 글이 동떨어진 죽은 글만 끊임없이 쓰고 있다고 그는 질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럴 것이다. 삶을 빠뜨린 채, 글에서 글로, 책에서 책으로 연쇄되고 이월되는 글쓰기가 문제 많은 글임에는 틀림이 없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글쓰기가 그 좋은 사례라 할 만하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두둥실
하늘은 들판 같고 뭉게구름 양떼 되었다.
지나가는 바람 목동되어 양떼를 몰고 간다.
양떼는 들판에 누워 풀을 뜯는다.
경남 어느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쓴 「하늘」이란 시인데, 이오덕 씨는 여기서 ‘양떼’와 ‘목동’은 자기의 삶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잘못 배워 길이 들어 늘 하는 말투가 표현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실제로 그는 그 증거로 “하늘은 넓은 목장 같고, 하얀 구름은 양떼 같습니다”란 제시문이 나온 초등학교 교과서 글짓기 연습문제를 들이댄다. 좀 과도하게 말하자면 이 학생의 머릿속에는 교과서가 그대로 들어앉아 있는 꼴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삶과 동떨어진 이런 글쓰기가 어른들의 글쓰기로 곧장 이어진다는 점이다. ㅈ일보의 신춘문예 당선작에 나오는 구절이다.
점보비행기는 생각보다 가볍게 날아올라 고도를 유지했다. 약간의 현기증을 안겨주는 동체의 흔들림도 잠시뿐,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도록 반사되는 구름은 푸른 초원을 향해 몰려가는 흰 양떼와도 같았다.
이쯤 되면 문제가 좀 심각해진다. 이를 두고 ‘종살이 말’이라고 이름붙이고 있거니와, 말이 그렇다면 글쓴이의 정신 또한 식민화되어 있을 터, 이로부터 해방됨을 일러 이오덕 씨는 ‘언어 민주화’로 요약한다. 그러므로 그의 ‘언어 민주화 운동’은 책이나 지식인이 독차지한 말을 삶이나 민중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이자 정신을 탈식민화하는 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오덕 씨가 갈무리하고 있는 생각의 속살들은 우리가 거쳐온 매우 착잡한 역사의 장 속에 자주 파묻힌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말을 삶에,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자는 그의 본래 뜻이 겉으로 발성되는 순간, 그것은 흔히 국어 순화주의의 외투를 걸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더러 근본주의나 언어 내셔널리즘에 ‘감염’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오덕의 ‘국어 순화주의’나 ‘언어 내셔널리즘’을 두고 나는 그의 본래 뜻이 ‘왜곡’되었다고 변호하지는 않을 참이다. 거기엔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그 자신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면도 있지 않았겠는가.
먼저 그는 국어학자나 이론가가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의 실천가이거나 일종의 ‘선교사’다. 더구나 ‘단일 언어 지역’(한국어에 관한 한 고종석 씨에게서 이 말은 자명하지 않다)에서 살아오면서 제국주의 언어 침탈을 강도 높게 겪어온 우리 역사의 좁은 통로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던 점도 참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어 제국주의와 언어 내셔널리즘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도 여기서 지적해 두어야겠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 음흉한 언어 제국주의가 눈물샘을 자극하는 언어 내셔널리즘으로 탈바꿈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 일임을 우리는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와 관련한 좀더 본격적인 논의는 언어학자 김하수가 해준다. 김하수 씨는 1930년 전후 식민지 조선의 언어관을 살피면서 이 둘이 맺고 있는 매우 아이로니컬한 관계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논점을 던진다. 그에 따르면, 독일 철학자 피히테(1762-1814)의 언어관은 독일 국수주의와 유럽 파시즘 발생의 사상사적 출발점이 되는데, 그의 “언어관에 담긴 파시즘의 맹아인 독소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는 이율배반적으로 해방의 메시지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민성사, 1999)이란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특히 발음기관을 통한 음성으로 여러 가지 대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결코 임의의 결정이나 약속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선 하나의 근본 원칙이 있기 때문에 어떤 개념도 인간의 발음기관을 통하면 이런 소리를 내게 마련이며, 결코 딴 소리를 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략) 이 순수한 인간적인 언어는 그 민족에게서 처음 들린 목소리로, 그 민족의 기관과 합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처음 목소리와 주어진 일정한 조건 아래서 이루어져야 했던 모든 발전과 결합되어, 그 민족의 현재의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는 언제까지나 똑같은 국어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어를 민족 정신에 곧바로 연결하고 있는 피히테의 언어관에 당시 식민지 지식인들이 끌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심정적 진실과 관계없이 “일본과 함께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길을 걷던 독일의 대표적인 보수 철학이 식민지 지식인 사회에서 대단히 날카로운 대항 담화를 엮어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 김하수 씨의 말은 늘 개체의 자기 진실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역사의 난감한 한 지점을 짚어준다.
나는 1925년생인 이오덕 씨에게서 이와 비슷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는 개인적으로 깨끗하고 야무진 견해를 펼쳤고 역사 문화적으로도 그만큼 결곡했지만, 현실의 장에서 만들어지는 그의 함수값은 지금 달리 산출되고 있는 까닭이다. ‘언어 민주화’를 내세우며 우리 말의 획일적 순화주의를 거부하고 있음에도 이오덕 씨에게서 ‘순혈주의’를 아예 걷어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에 더해 이른바 지구화 시대는 이오덕 씨를 지나 민족을 넘어 세상으로 퍼져나갈 것이고, 아울러 세상은 좀더 잡스러워질 것이다. 이런 판에 말인들 감염되지 않고 배겨날 재간이 있겠는가?
2.
고종석 씨의 글을 읽는 일은 내게 큰 즐거움이다. 짧은 조각글 한 편을 쓰더라도 거기엔 그만한 글쓰기의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한국 사회의 단층선들을 따라 움직여가는 그의 글엔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맛이 있다. 우선 그의 글이 자꾸 우리 사회의 솔기들을 자주 건드리는 통에 나는 물색없이 흥분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부드러운 글놀림은 나 같은 얼치기 ‘엄숙주의자’에겐 그 맛이 더하다. 뭐랄까, 꼭 배관이 잘된 집 같달까, 그의 글에는 메시지의 질량과 문체의 휘발이 함께 있어 불편하지 않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매우 도발적인 경우에도 그렇다. 좀 실례가 되는 비유인진 몰라도,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더러는 물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되, 그 흐름에 자신을 아주 내주지는 않는 유선형 물고기를 연상한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시류를 한껏 머금고 있지만 시류에 쉽게 영합하지는 않는 ‘외로 된’ 자유주의자다. 자유주의자로서 고종석의 글은 그야말로 솔기를 기어가듯이 어느 한쪽에 쉬 안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작에 나는 그의 『서얼단상』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감염된 언어』를 보자, ‘아하, 이 양반이 언어의 적통성에 시비를 거는구나!’ 하고 단박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석 씨의 『감염된 언어』가 이오덕 씨의 『우리말 바로 쓰기1, 2, 3』을 부러 겨냥해서 비판한 책은 전혀 아니다. 고종석 씨 책에 이오덕 씨에 대한 말은 각주에 딱 한 번 나올 뿐이다. 그것도 비판적인 언사는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내가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불순함의 옹호자이기 때문이다. 불순함을 옹호한다는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의 단색 취향, 유니폼 취향을 혐오한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쉰다. 나는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北伐) 정왜(征倭)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불순함의 옹호자’임을 자임하며 ‘국어의 혼탁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고종석 씨의 발언은 확실히 전복적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언어 제국주의에 일종의 대항 담론으로 맞서왔던 언어 내셔널리즘을 거치지 않고서도 언어 민주주의에 이를 수 있음을 속 시원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언어학자 김하수 씨가 지적한 ‘역사의 아이러니’, 곧 언어 내셔널리즘이 언어 제국주의로, 언어 제국주의가 언어 내셔널리즘으로 왕복운동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옹색한 매듭 하나를 훌륭하게 풀어준다. 그러는 가운데 둘 사이에 협착된 채 어쩔 수 없는 한국 역사의 좁은 통로를 걸어오며 언어 민주화의 길을 힘겹게 모색해온 이오덕 씨에게 언어 민주화에 이르는 새로운 선택지 하나를 늘려준다. 물론 이오덕 씨가 이 선택지를 선뜻 고를지는 미지수로 남지만 말이다.
생전에 이오덕 씨가 『감염된 언어』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아마 이오덕 씨는 고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언어 민주화라지만 고종석 씨가 마련해 준 이 길은 말의 온갖 ‘잡탕’을 뒤집어써야 하는 길이 아닌가? 고종석 씨는 책에서 복거일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두고 “자유주의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민족주의 문제를 살피며 세상사를 바라보는 혜안을 보여주고 있다”고 밝히고 있거니와, 그는 복거일 씨를 ‘선용’하여 민족주의라는 난감한 ‘감옥’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래서 이오덕 씨가 민족주의라는 틀 안에서 언어 민주화를 꿈꾼다면, 고종석 씨는 민족주의의 틀 바깥에서 언어 민주화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언어 민주화’라지만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자 고종석 씨의 그것은 새로운 의미 계열을 얻는다. 『우리글 바로 쓰기』에서는 ‘뿌리-토박이말-백성의 말-언어 민주화’로 계열화되던 것이 『감염된 언어』에서는 ‘감염-혼탁-풍요-언어 민주화’로 계열화된다. 시공간상으로 보아 전자가 후자보다 바깥을 향해 더 열려 있다. 고종석 씨는 이를 통해 자신의 논지를 폭넓게 확장한다. 고종석 씨의 의도나 이오덕 씨의 진정성과는 별도로, 고종석 씨의 논지가 확장되면 될수록 이오덕 씨의 논지는 상대적으로 자꾸 좁아 보인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확장되면 될수록 이오덕 씨의 그것은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산물로 여겨지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잖은가?
고종석 씨는 먼저 “어휘의 교체가 꼭 고유어와 한자어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고유어가 고유어를 밀어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라고 전제한다. 이를테면“‘고삐’는 ‘셕’(‘혁’)을 밀어냈고, ‘가다’는 ‘니다’를 몰아냈고, ‘몇’은 ‘현’을 밀어냈고, ‘많다’와 ‘크다’는 ‘하다’를 밀어냈다”는 것이다. 이로써 중국의 한자어나 일본제 한자어, 또는 일본어 번역투가 유입되기 직전의 한국 고유어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거나 자명하지 않은 것이 된다. 사정이 이렇다면, 어휘의 교체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우연적인 사건이 되고, 좀더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것은 변화 자체가 된다. 이렇게 되면 고유어와 고유어 간의 교체든 고유어와 외래어 간의 교체든 간에 모든 교체는 변화라는 보편적 지평 위에서 일어나는 동등한 사건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라 경덕왕 때 우리나라의 고유지명과 문무관의 직명이 한자어로 바뀐 사례나 일제 시대에 일본제 한자어가 한국어를 ‘침식’한 것은 다 변화의 한 ‘경우’이거나 특정한 시대의 한 ‘산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논리적 기반 위에서 고종석 씨는 한국어에 들러붙어 있는 단일언어 신화와 그에 바탕한 언어 순혈주의 신화를 차근차근 벗겨낸다. 그렇다고 고종석 씨의 이 작업을 그 자신 ‘스승’으로 ‘모신다’는 복거일 씨의 ‘언어 시장주의’(이런 말이 본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복거일 씨에 대해서 이 말을 쓴다. 그는 언어를 비정한 화폐처럼 보기 때문이다. 복거일 씨에게 언어는 교환가치에 지나지 않는다.)와 동일시하고 싶진 않다. 그러기엔 고종석 씨의 한국어 사랑은 매우 뿌리 깊고 각별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고종석 씨 스스로도 자신을 “스승에게 칼을 들이대는 배덕자”라지 않는가?
아무튼 고종석 씨는 자신의 신화 벗기기 작업을 매우 흥미로운 화두를 던지면서 시작한다. 곧 오늘날의 황지우의 시를 향가 「원가(怨歌)」(일명 「잣나무가」)를 지었다는 8세기 신라 시인 신충(信忠)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묻는다. 답은 우리가 「원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신충도 황지우의 「뜰 앞의 잣나무」란 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황지우의 시를 짜고 있는 어휘소들이 신충의 어휘목록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설프게나마 한국어를 배운 이 시대의 외국인이, 그가 재능 있는 시인이라면, 「뜰 앞의 잣나무」 같은 시를 쓸 가능성이 신충의 경우보다 더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화과정’에서 여러 언어로 갈라지지 않은 한국어의 경우, ‘핏줄의 신화’가 창궐할 여지가 많긴 하지만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별개의 언어가 된다.
8세기의 한국인 신충과 그가 사용하던 한국어가 내게는 20세기의 외국인 아무개나 그가 사용하는 외국어보다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중략) 8세기의 한국어와 지금 한국어의 차이는 지금의 한국어와 일본어의 차이보다 작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어와 지금의 일본어를 닮게 만드는 것은 한국어와 일본어 안에 있는 외래요소들, 우리와 그들 안에 있는 타자(他者)들이다.
이렇게 되면 순혈주의 신화는 결국 픽션이 된다. 그러나 이 픽션을 수긍하는 순간 우리는 의외의 소득을 얻는다. 프랑스어가 라틴어계 어휘를, 영어가 프랑스계 어휘를 받아들이고도 콤플렉스를 갖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언어를 풍요롭고 세련되게 하였듯이, 한국어도 순혈주의를 버릴 때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게 고종석 씨의 전언이다. 즉 “1066년 이래 프랑스어의 ‘침략’이 영어를 살찌웠듯, 고대 이래 한자어의 ‘침략’은 한국어의 어휘를 크게 늘리며 거기에 세련된 뉘앙스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는 어떤 외래어에도 저항을 보인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영어에는 세계 구석구석이 원산지인 어휘들이 들어 있고, 심지어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도 어휘를 차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의 연장선에서 고종석 씨는 이질적인 언어에 대한 ‘못마땅한 선택’, ‘비주체적인 선택’이란 다소 역설적이지만 매력적인 열쇠말을 길어올린다.
19세기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꽃핀 이른바 ‘난학(蘭學)’의 경우가 그러한데, 이 말은 일본 사람들이 당시에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럽의 학문을 번역할 때 자기들의 말이 아니라 한자를 가지고 번역한 걸 두고 한 표현이다. 그 덕에 한국은 물론, 한자의 고향인 중국에서마저도 일본제 한자를 수입하여 쓰게 되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곧 ‘못마땅한 선택’이 일본어에 큰 영예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일본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학자들도 ‘비주체적 선택’으로 새로운 개념어들을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바탕으로 만듦으로써, 이들을 다른 언어권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3.
나는 이오덕 씨의 『우리글 바로 쓰기1, 2, 3』과 고종석 씨의 『감염된 언어』 둘 다 우리 사회에서 매우 보기 드문 역작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두 책 모두 우리 말을 향한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나는 본다. 그런데 사랑과 열정만이 아니라, 실상 두 사람이 펼치고 있는 논지 역시 결국엔 같은 지점을 향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즉 ‘우리 말글을 살리자’는 이오덕 씨의 주장에 『감염된 언어』를 맞세우기는 했지만 둘 다 ‘언어 민주화’를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오덕 씨만 하더라도 인위적인 언어정책을 배격하고 말글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국민’이란 말이 들어간 낱말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는 지식인이나 행정가가 아니라 백성들이 말글의 주인이 되어야 삶과 일치하는 말글이 된다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자신을 ‘선생님’이라 자칭하는 강론투의 말과 목사의 설교투도 자연스런 입말이 아니라는 점에서 배격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이가 어른에게 지나친 존대말을 쓰는 것도 아이에게 안 맞는 획일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며 비판한다. 그러면 고종석 씨는 어떤가? 그 역시 인위적인 언어 정책을 무척 싫어하는 자유주의자다. 그는 언어에 대한 태도로 ‘개방형’을 좋아한다며 “가장 좋은 언어정책은 언어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역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잡스런 현실에 ‘감염’된 언어를 그냥 내버려두자는 쪽이다. 곧 현실적인 삶이 묻어 있는 언어가 진짜 살아 숨쉬는 말이고, 살아 숨쉬는 말은 곧 ‘감염된 언어’라는 것이다.
그럼 둘은 다르기나 한 건가? 다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다른가? 장(場)이 다르다. 이오덕 씨가 바라보는 관료나 지식인이나 국가에는 아직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묻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생산하는 언어에도 역시 백성을 억압하는 일사불란한 획일주의가 여전히 묻어 있다. 그러므로 이오덕 씨에게 참된 말글은 관료와 지식인과 국가의 반대편, 즉 ‘백성’에게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곳은 그 대척점으로서 내셔널리즘이 있는 장이다. 따라서 그의 ‘백성’은 은연중 ‘민족주의자’로서의 ‘백성’이 된다. 그것이 곧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우리말’을 쓴다는 것과 ‘삶이 살아 숨쉬는 말’을 쓴다는 것은 실상 논리적으로 아무 연관을 맺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 고종석 씨는 ‘세계적 보편주의’에 가깝다. 그는 자유주의적 현실주의자(이런 말이 있기나 한 건지!)지만 그의 자유와 현실은 세계로 퍼져 있다. 따라서 그에게 ‘국가’는 경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언어에는 세계의 콩고물이 자유롭게 묻어 있다. 분에 넘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이 지점에서 이오덕 씨한테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설사 그가 고인이 되어 있더라도!). ‘백성’들이 이제 ‘세계시민’으로 점점 이동해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고종석 씨에 대해서도 할 말이 좀 있다. 다른 게 아니라, 복거일 씨와의 거리 조정에 좀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복거일이 베스트셀러를 옹호할 때 그에게서는 대중, 민중에 대한 사랑이 엿보인다. 전두환이 김영삼 정권에서 당한 일에 대해 동정을 표하며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라고 복거일이 말할 때, 그에게선 이미 확립된(어떤 식으로 확립됐든) 권위나 힘에 대한 존중이 읽힌다.
나는 인용문에서 ‘이미 확립된 권위나 힘에 대한 존중’(복거일 씨에 대한 이런 날카로운 지적을 보면 정말 고종석답다는 생각이 든다)이란 대목과 ‘복거일이 베스트셀러를 옹호할 때’ 부분이 눈에 밟힌다. 그렇다고 내가 복거일 씨를 무조건 부정하느냐? 그건 아니다. 나는 그의 책을 즐겨 읽고 때로 그의 치밀하고 명민한 사유에 감탄하고 그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또 귀기울여 들을 만한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가 드러내는 사유의 웃자람이 섬뜩할 때가 있다. 복거일 씨에게서 보편성으로의 지향을 읽을 때가 바로 그때다. 그때마다 나는 그가 일종의 ‘보편의 허구’에 빠져들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복거일 씨가 ‘지구제국’의 중심으로 미국을 얘기할 때 나는 거기서 ‘이미 확립된 권위나 힘에 대한 존중’을 읽는다. 나아가 나는 거기서 ‘숫자나 양(量)에 대한 존중’을 알아챈다. ‘숫자나 양으로 확립된 힘에 대한 존중’을 간파한다. ‘베스트셀러’와 ‘이미 확립된 힘’은 그렇게 숫자나 양으로 매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걸 균질화한 채 양화(量化)하는 사유, 질이나 정서 따위는 불문에 부치는 사유가 초래할 결과가 나는 섬뜩하다. 거기엔 또다시 전체주의 사유가 흘러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거기엔 숫자와 양만이 문제이므로. 내가 언어를 마치 시장의 양화된 화폐로 취급하는 복거일 씨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종석 씨가 복거일 씨 쪽으로 한 3분의 2쯤은 가 있는 것 같아 노파심에서 해본 소리다. 다만 ‘상상의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 ‘민족’이 픽션인 것처럼, ‘숫자의 공모’, ‘양의 공모’일 수도 있을 보편성도 혹 픽션은 아닐는지? ‘공모의 공동체’는 아닐는지?
글쓴이: 권정관(문화평론가, 『비평과 전망』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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