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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학 이론의 두 얼굴

靑思 김성학 2011. 5. 24. 16:58

문학 이론의 두 얼굴 /양영길

 

 

 

야구, 축구, 농구 등의 운동 경기를 구경하는데 그 규칙과 작전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그 경기를 더 재미있게 구경할 수 있다(운동 경기에서는 어느 한 쪽을 응원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작전이니 규칙이니 이런 것과 관계없이 열광하면서 즐길 수도 있다.). 운동 경기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즐기고자 하는 그 무엇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더 재미있게 보고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많이 알면 재미없는 것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이 그것이다. 촬영 기법, 편집 기법이나 속임수인 트릭을 전부 알아버리면 무슨 재미로 영화를 본단 말인가. 보통 사람들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몰두와 긴장의 맛에 흠뻑 빠져들고 있을 때, 영화 평론가처럼 의무감 때문에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봐야만 하는 고역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학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한 편의 시나 소설을 읽어도 보통 사람들이 즐기는 보통의 즐거움을 모른 채 이론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리거나 깔깔대며 웃는 것이 더 없이 부러울 때가 있다. 전문가들 스스로 파 놓은 함정이라고나 할까. 집착과 애증의 짝사랑이라고나 할까.


이론을 알면 시험은 잘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잘 치른다는 것과 시나 소설을 잘 쓴다는 것이나 문학을 즐긴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문학은 논리적 사고 이외에 정서적 반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먼저 나왔을까. 아니면 이를 위한 문학 이론이 먼저 나왔을까. 당연히 문학이 먼저 나왔고 이를 체계화하기 위한 이론이 나중에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론의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문학이 문학 이론에 의해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면과 무시를 받는 것들이 올바로 인식되고 발전될 수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론가들이 외면한 것들은 그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 가치는 그 이론가들의 방법에 의해서만 무시된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문학 이론 밖에서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것들을 찾아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여 문학적으로 다듬어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이 문학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문학 이론은 그 동안의 문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된 것일 뿐이다. 문학 이론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쓴 작품들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쓰는 작품은 문학 이론을 알고 이것을 뛰어 넘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읽을 만한 작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문학 이론은 문학 작품을 읽고 쓸 때 기초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재발견', '재창조'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 문학 이론은 다만 참고 사항일 뿐이다.

 

출처 : 시와 인연
글쓴이 : 양애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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